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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 2013의 게시물 표시

The bench with the wall

The bench with the wall   담장, 혹은 벽... 편안히 쉴 공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면, 더 이상 편안한 공간이 되기 어렵습니다. 전원주택에서 멋도 살리고 편안한 쉴 공간에 벽 + 의자 로 연출해 보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수납의 최고봉

수납도 이정도 경지면예술이죠? ^^b

black ceramic Oma

black ceramic Oma Susanna Hoikkala 와 Jenni Ojala의 2002년 디자인 작품 'black ceramic Oma' 과즙을 낼때 여러가지 제품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단순하고 깔끔한 모양이 마음에 드네요.

조선의 파락호

조선의 파락호  한자어로 ‘파락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를 의미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의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한다.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덥치는 수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원도 다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다고 합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 마저도 친정 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장 농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초, 화초 받침대 만들기

  빈 캔과 나무집게를 이용해 만든 초 & 화분 받침대 입니다. 쉽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나무집게의 경우 다이소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더군요. 한번 만들어 보세요.

다쓴 전구로 화병 만들기

다 쓴 전구와 굵은 철사로 만드는 예쁜 소품 입니다. 만드실땐 손조심 ^^ 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멋이 있어 보이네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여자의 약속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여자의 약속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우리집에 오신 것은 결혼초 한번을 빼면 처음이다. 청상과부이신 시어머니는 아들둘 모두 남의 밭일 논일을 하며 키우셨고, 농한기에는 읍내 식당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일만하시던 시어머니는 아들 둘다 대학졸업시키신 후에야 일을 줄이셨다고 한다. 결혼 전 처음 시댁에 인사차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었다. 고생도 안해본 서울아가씨가 이런 집에 와보니 얼마나 심란할꼬. 집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가진거 없는 우리 아랑 결혼해준다고 해서 고맙다. 장남인 남편과 시동생은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국립대를 나왔고, 군대시절을 빼고는 내내 과외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등록금을 보태고 용돈을 썼다고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느라 연애는 커녕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늘 좋다는 친구들 후배들이 줄줄 따른다. 둘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건강하고 밝은 성격에 회사에서도 그는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 그는 망설였다. 자기는 가진거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후였고, 삼고초려끝에 그는 나를 받아주었다. 그의 집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를 우리집에 데려갔다. 그의 외모와 직업에 우리 부모님은 그를 반겨주었다. 집이 지방이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신다고 했을때 엄마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가진거라고는 월세 원룸보증금과 얼마간의 저축이 전부다 했을때 아빠가 담배를 피우셨다. 그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허리한번 못펴시고 우리 형제 위해 평생을 밭에서 엎어져 살아온 어머니께 배운 덕분으로 어디가서도 영은이 굶겨죽이지 않을 자신있습니다. 공주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여자의 약속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우리집에 오신 것은 결혼초 한번을 빼면 처음이다. 청상과부이신 시어머니는 아들둘 모두 남의 밭일 논일을 하며 키우셨고, 농한기에는 읍내 식당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일만하시던 시어머니는 아들 둘다 대학졸업시키신 후에야 일을 줄이셨다고 한다. 결혼 전 처음 시댁에 인사차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었다. 고생도 안해본 서울아가씨가 이런 집에 와보니 얼마나 심란할꼬. 집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가진거 없는 우리 아랑 결혼해준다고 해서 고맙다. 장남인 남편과 시동생은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국립대를 나왔고, 군대시절을 빼고는 내내   과외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등록금을 보태고 용돈을 썼다고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느라 연애는 커녕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늘 좋다는 친구들 후배들이 줄줄 따른다. 둘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건강하고 밝은 성격에 회사에서도 그는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 그는 망설였다. 자기는 가진거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후였고, 삼고초려끝에 그는 나를 받아주었다. 그의 집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를 우리집에 데려갔다. 그의 외모와 직업에 우리 부모님은 그를 반겨주었다. 집이 지방이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신다고 했을때 엄마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가진거라고는 월세 원룸보증금과 얼마간의 저축이 전부다 했을때 아빠가 담배를 피우셨다. 그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허리한번 못펴시고 우리 형제 위해 평생을 밭에서 엎어져 살아온 어머니께 배운 덕분으로 어디가서도 영은이 굶겨죽이지 않을 자신있습니다. 공주처럼 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