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일 토요일

The bench with the wall

The bench with the wall 




담장, 혹은 벽...

편안히 쉴 공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면, 더 이상 편안한 공간이 되기 어렵습니다.

전원주택에서 멋도 살리고 편안한 쉴 공간에 벽 + 의자 로 연출해 보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2013년 2월 28일 목요일

black ceramic Oma

black ceramic Oma


Susanna Hoikkala 와 Jenni Ojala의 2002년 디자인 작품 'black ceramic Oma'


과즙을 낼때 여러가지 제품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단순하고 깔끔한 모양이 마음에 드네요.

조선의 파락호

조선의 파락호 



한자어로 ‘파락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를 의미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의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한다.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덥치는 수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원도 다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다고 합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 마저도 친정 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장 농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라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않겠나?”.고 하자
그는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이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동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478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922031011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초, 화초 받침대 만들기





빈 캔과 나무집게를 이용해 만든 초 & 화분 받침대 입니다.
쉽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나무집게의 경우 다이소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더군요.
한번 만들어 보세요.


2013년 2월 26일 화요일

다쓴 전구로 화병 만들기



다 쓴 전구와 굵은 철사로 만드는 예쁜 소품 입니다.

만드실땐 손조심 ^^

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멋이 있어 보이네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여자의 약속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여자의 약속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우리집에 오신 것은 결혼초 한번을 빼면 처음이다.

청상과부이신 시어머니는 아들둘 모두 남의 밭일 논일을 하며 키우셨고,
농한기에는 읍내 식당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일만하시던 시어머니는 아들 둘다 대학졸업시키신 후에야 일을 줄이셨다고 한다.

결혼 전 처음 시댁에 인사차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었다.
고생도 안해본 서울아가씨가 이런 집에 와보니 얼마나 심란할꼬.
집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가진거 없는 우리 아랑 결혼해준다고 해서 고맙다.

장남인 남편과 시동생은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국립대를 나왔고, 군대시절을 빼고는 내내
과외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등록금을 보태고 용돈을 썼다고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느라 연애는 커녕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늘 좋다는 친구들 후배들이 줄줄 따른다.

둘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건강하고 밝은 성격에 회사에서도 그는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

그는 망설였다.
자기는 가진거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후였고,
삼고초려끝에 그는 나를 받아주었다.

그의 집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를 우리집에 데려갔다.
그의 외모와 직업에 우리 부모님은 그를 반겨주었다.

집이 지방이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신다고 했을때 엄마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가진거라고는 월세 원룸보증금과 얼마간의 저축이 전부다 했을때 아빠가 담배를 피우셨다.

그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허리한번 못펴시고 우리 형제 위해 평생을 밭에서 엎어져 살아온 어머니께 배운 덕분으로
어디가서도 영은이 굶겨죽이지 않을 자신있습니다.
공주처럼 고이 키우신 딸 고생문이 훤하다 걱정되시겠지만,
그래도 영은이에 대한 저의 사랑, 열심히 당당하게 살 각오가 되어있는 제 결심 이것만 높이 사주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친정아버지가 마련해주신 돈과 회사에서 받은 전세자금 대출로 신혼집을 마련하고,
그와 내가 모은 얼마간의 저축으로 혼수를 했다.

너무 행복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으로 내려갔다.
마침 어버이날과 어머니 생신이 겹쳤다.
일부러 주말을 잡아 내려갔다.
시동생도 오고 어머니와 마당평상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밭에서 상추를 뜯어다 먹는데
그맛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삼겹살이었다.

그날 밤 작은 방에 예단으로 보내드렸던 이불이 깔려있었다.
어머니는 한번도 그 이불을 쓰시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더러 그방에 자라고 하신다.

싫다고 뿌리치는 어머니 손목을 끌어 작은방으로 모셨다.

어머니하고 자고 싶어요.
신랑은 도련님하고 넓은 안방에서 자라고 할거에요.
어머니랑 자고 싶어요.

어머니는 목욕도 며칠 못했고, 옷도 못갈아입었다고
이불 더럽혀 지고 니가 불편해서 안된다. 냄새나 안된다고 자꾸 도망가려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소주마시고 싶다고 졸라 함께 소주를 먹었다.
어머니가 찢어주시는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소주를 홀랑홀랑 비우고
취해 잠들어버렸다.

자다 목이 말라 깨어보니 나는 이불 한가운데 누워 자고 있고
어머니는 겨우 머리만 요에 얹으신 채로 방바닥에 쪼그리고 주무시고 계셨다.

슬쩍 팔을 잡아 요위에 끌어드렸다.
야야~ 고운 이불 더럽혀 진다. 냄새밴대이...

어머니에겐 냄새가 났다 정말.
울엄마에게 나던 화장품 냄새를 닮은 엄마냄새가 아닌,
뭐락 말할수 없는 부뚜막 냄새 흙냄새 같은..

그 냄새가 좋아서 나는 내려갈때마다 어머니와 잔다.

이제는 손주와 주무시고 싶다며 나를 밀쳐 내시지만 악착같이 어머니 한쪽 옆자리는 나다.

어떤 밤이던가 어머니 옆에 누워 조잘거리던 내게
니는 꼭 딸 낳아라. 이래서 사람들이 딸이 좋다하는갑다.
니가 이래해주니 니가 꼭 내 딸같다~
뒷집이고 옆집이고 도시 며느리본 할망구들 다 나완젼 부러워 한다.
며느리들이 차갑고 불편해해서 와도 눈치보기 바쁘다 하드라.
뭐 당연하다. 내도 니가 첨 인사왔을때 어찌나 니가 불편하진 않을까 더럽다고 싫다진 않을까
걱정을 했던지...말도 못해. 근데 당연한거 아이가...
그러니 딸이 좋다 카는거지...
나는 니가 이래 딸처럼 대해주니 뭐 딸없어도 되지만 니는 꼭 딸 낳아라...

진즉부터 혼자계시던 어머니가 걱정이었는데 결국 사단이 났다.
상을 들고 방에 들어가시다 넘어지셔서 가뜩이나 퇴행성 관절염이 심한 다리가 아예 부러지셨다 했다.

도련님이 있는 대구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노인이라 뼈도 잘 안붙는다고 철심도 박고 수술하고 3개월을 그렇게 병원에 계시다가 지난 주 퇴원을 하셨다.

어머니가 뭐라거나 말거나 그 사이 나는 내려가서 간단히 어머니 옷가지며 짐을 챙겨
우리집에 어머니 방을 꾸렸다.
아들녀석은 할머니가 오신다고 신이나있고,
표현할줄 모르는 남편은 슬쩍슬쩍 그방을 한번씩 들여다보며 웃는 것을 나도 안다.

당연히 우리집에 곱게 오실리가 없다.
어머니! 저 둘째 가져서 너무 힘들어요!!
우리 친정엄마 허구헌날 노래교실에 뭐에 승민이도 잘 안봐주시고,
제가 회사에 임신에 육아에 힘들어 죽겠어요!
와서 저도 도와주세요!
임신하니까 어머니 음식이 그렇게 땡겨 죽겠단말이에요!

그말에 못이기는 척 어머니가 오셨다.

친구들이 말했다.
니가 모시고 살아봐야 힘든줄을 알지.
착한 며느리 노릇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그래 맞다.
내가 안해봐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머니와 살면서 힘든일이 생기고 어쩌면 어머니가 미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럴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쓰고 올린다.

여기 많은 분들이 이렇게 증인이니,
혹여나 어머니가 미워지고 싫어져도 나는 이제 어쩔수 없다.
그냥 이게 내 팔자려니 열심히 지지고 볶고 하면서 같이 사는 수밖에~

승민 아빠 사랑해~
어머니 김치 담아주세요~

.
.
.
.
.
.
.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여자의 약속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우리집에 오신 것은 결혼초 한번을 빼면 처음이다.

청상과부이신 시어머니는 아들둘 모두 남의 밭일 논일을 하며 키우셨고,
농한기에는 읍내 식당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일만하시던 시어머니는 아들 둘다 대학졸업시키신 후에야 일을 줄이셨다고 한다.

결혼 전 처음 시댁에 인사차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었다.
고생도 안해본 서울아가씨가 이런 집에 와보니 얼마나 심란할꼬.
집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가진거 없는 우리 아랑 결혼해준다고 해서 고맙다.

장남인 남편과 시동생은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국립대를 나왔고, 군대시절을 빼고는 내내
 
과외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등록금을 보태고 용돈을 썼다고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느라 연애는 커녕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늘 좋다는 친구들 후배들이 줄줄 따른다.

둘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건강하고 밝은 성격에 회사에서도 그는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

그는 망설였다.
자기는 가진거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후였고,
삼고초려끝에 그는 나를 받아주었다.

그의 집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를 우리집에 데려갔다.
그의 외모와 직업에 우리 부모님은 그를 반겨주었다.

집이 지방이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신다고 했을때 엄마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가진거라고는 월세 원룸보증금과 얼마간의 저축이 전부다 했을때 아빠가 담배를 피우셨다.

그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허리한번 못펴시고 우리 형제 위해 평생을 밭에서 엎어져 살아온 어머니께 배운 덕분으로
어디가서도 영은이 굶겨죽이지 않을 자신있습니다.
공주처럼 고이 키우신 딸 고생문이 훤하다 걱정되시겠지만,
그래도 영은이에 대한 저의 사랑, 열심히 당당하게 살 각오가 되어있는 제 결심 이것만 높이 사주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친정아버지가 마련해주신 돈과 회사에서 받은 전세자금 대출로 신혼집을 마련하고,
그와 내가 모은 얼마간의 저축으로 혼수를 했다.

너무 행복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으로 내려갔다.
마침 어버이날과 어머니 생신이 겹쳤다.
일부러 주말을 잡아 내려갔다.
시동생도 오고 어머니와 마당평상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밭에서 상추를 뜯어다 먹는데
 
그맛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삼겹살이었다.

그날 밤 작은 방에 예단으로 보내드렸던 이불이 깔려있었다.
어머니는 한번도 그 이불을 쓰시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더러 그방에 자라고 하신다.

싫다고 뿌리치는 어머니 손목을 끌어 작은방으로 모셨다.

어머니하고 자고 싶어요.
신랑은 도련님하고 넓은 안방에서 자라고 할거에요.
어머니랑 자고 싶어요.

어머니는 목욕도 며칠 못했고, 옷도 못갈아입었다고
이불 더럽혀 지고 니가 불편해서 안된다. 냄새나 안된다고 자꾸 도망가려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소주마시고 싶다고 졸라 함께 소주를 먹었다.
어머니가 찢어주시는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소주를 홀랑홀랑 비우고
취해 잠들어버렸다.

자다 목이 말라 깨어보니 나는 이불 한가운데 누워 자고 있고
어머니는 겨우 머리만 요에 얹으신 채로 방바닥에 쪼그리고 주무시고 계셨다.

슬쩍 팔을 잡아 요위에 끌어드렸다.
야야~ 고운 이불 더럽혀 진다. 냄새밴대이...

어머니에겐 냄새가 났다 정말.
울엄마에게 나던 화장품 냄새를 닮은 엄마냄새가 아닌,
뭐락 말할수 없는 부뚜막 냄새 흙냄새 같은..

그 냄새가 좋아서 나는 내려갈때마다 어머니와 잔다.

이제는 손주와 주무시고 싶다며 나를 밀쳐 내시지만 악착같이 어머니 한쪽 옆자리는 나다.

어떤 밤이던가 어머니 옆에 누워 조잘거리던 내게
니는 꼭 딸 낳아라. 이래서 사람들이 딸이 좋다하는갑다.
니가 이래해주니 니가 꼭 내 딸같다~
뒷집이고 옆집이고 도시 며느리본 할망구들 다 나완젼 부러워 한다.
며느리들이 차갑고 불편해해서 와도 눈치보기 바쁘다 하드라.
뭐 당연하다. 내도 니가 첨 인사왔을때 어찌나 니가 불편하진 않을까 더럽다고 싫다진 않을까
걱정을 했던지...말도 못해. 근데 당연한거 아이가...
그러니 딸이 좋다 카는거지...
나는 니가 이래 딸처럼 대해주니 뭐 딸없어도 되지만 니는 꼭 딸 낳아라...

진즉부터 혼자계시던 어머니가 걱정이었는데 결국 사단이 났다.
상을 들고 방에 들어가시다 넘어지셔서 가뜩이나 퇴행성 관절염이 심한 다리가 아예 부러지셨다 했다.

도련님이 있는 대구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노인이라 뼈도 잘 안붙는다고 철심도 박고 수술하고 3개월을 그렇게 병원에 계시다가 지난 주 퇴원을 하셨다.

어머니가 뭐라거나 말거나 그 사이 나는 내려가서 간단히 어머니 옷가지며 짐을 챙겨
우리집에 어머니 방을 꾸렸다.
아들녀석은 할머니가 오신다고 신이나있고,
표현할줄 모르는 남편은 슬쩍슬쩍 그방을 한번씩 들여다보며 웃는 것을 나도 안다.

당연히 우리집에 곱게 오실리가 없다.
어머니! 저 둘째 가져서 너무 힘들어요!!
우리 친정엄마 허구헌날 노래교실에 뭐에 승민이도 잘 안봐주시고,
제가 회사에 임신에 육아에 힘들어 죽겠어요!
와서 저도 도와주세요!
임신하니까 어머니 음식이 그렇게 땡겨 죽겠단말이에요!

그말에 못이기는 척 어머니가 오셨다.

친구들이 말했다.
니가 모시고 살아봐야 힘든줄을 알지.
착한 며느리 노릇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그래 맞다.
내가 안해봐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머니와 살면서 힘든일이 생기고 어쩌면 어머니가 미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럴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쓰고 올린다.

여기 많은 분들이 이렇게 증인이니,
혹여나 어머니가 미워지고 싫어져도 나는 이제 어쩔수 없다.
그냥 이게 내 팔자려니 열심히 지지고 볶고 하면서 같이 사는 수밖에~

승민 아빠 사랑해~
어머니 김치 담아주세요~
 
.
.
.
.
.
.
.